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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Be Hasty
2025-08-08 ~ 2025-09-06


💁‍♀️ 
"Don't be hasty, that is my motto. "

🔉  TIP

운영시간
📍 장소 : 페리지갤러리 
⏰ 월~토: 10:30~18:00
❗ 휴무: 일 

콘텐츠
✅ Don’t Be Hasty

글 모희 (페리지갤러리 큐레이터)

“서두르지 마시오, 이것이 나의 신조다. 그러나 보아하니 너희는 성급한 족속이구나. 나를 신뢰함에 감사하지만, 갑작스레 모든 것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엔트에도 여러 종류가 있거든. 겉보기엔 엔트 같아도 진짜가 아닌 것들 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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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전시를 준비하며 지나온, 비교적 최근에 느낀 속도에 관한 감회. 어느 날 ‘꽝’하고 떨어져 역행했던 현재로부터 본래의 시간을 회복하기까지, 느리게 소용돌이 치는 시간 속에서 가늠했던 것은 현행된 과거와 두 시차만큼 더 멀리 유보된 미래, 시급한 오늘의 사태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부유의 감각이었다. 조각조각 흩어져 붕괴되어버린 시간은 지금의 위치를 헤아리기 어렵게 했다. 끝내 종결되지 못한 어제, 빠르게 휘말려 들었다가 금세 부동하기를 반복하는 매 순간 앞에 현재는 모습을 감췄다. 그날들에서 사라진 것은 시간과 함께 따라붙는 속도의 감각이기도 했다. 다른 무엇과의 거리, 연속적인 변화 속에서 비로소 측정되는 속도는 그 상대적인 참조점의 상실로 인해 다리를 잃었다. 그러나 없는 발로 향해야 하는 곳은 어제의 기억이 자리 잡지 못한 과거의 의식에 있었음을 오늘에 되새긴다. 그곳에 머무는 의식은 쉽게 속단하던 세계가 이지러진 곳에서, 자신이 기입될 미래를 기다린다. 앞선 것이 뒤따르는 것의 안으로 침투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2)
기억은 과거의 상(象)을 간직한 정신을 통해 개념적으로 표상된 시간으로부터 달아난다. 앙리 베르그송은 일찍이 시간을 의식의 질적인 흐름과 기억 안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베르그송에게 시간, 곧 지속(durée)은 오로지 내적 관조의 형태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둘 때 “가장 깊은 바탕에서 발견”하게 되는 연속적인 이어짐이다.3) 때문에 지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곁하여 있는 단속성에서 벗어나 연속성으로 이행해 가는 기억의 작용이다. 거꾸로, 시간은 언제나 기억의 작용을 일으킨다. 다행인 것은 ‘이야기된’ 기억의 생은 현실의 여러 수단을 거쳐 일시적으로나마 연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소구해야 하는 것은 목도한 눈과 열린 귀, 말하는 입을 경유하여 약동하는 이야기(narrative)일 것이다.

현대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우리가 감각한 ‘시간 없음’이 물리학적으로도 설명 가능한 것임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시간을 시험에 빠뜨리는 문제들에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반사된 빛을 건너 우리의 삶으로 돌아온다. 즉 시간의 객관성이 무너진 자리에 죽음으로 종착하는 삶의 취약성을 새겨 넣는다. 나아가 나와 너, 나와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과 기억, 사건들로 경험되는 시간을 말한다. 베르그송이 개별 주체의 직관과 기억을 통해 시간을 지속으로 파악하고자 했다면, 로벨리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정서와 기대로 이루어진 이야기에서 시간을 찾는다. 여전히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오직 사건들과 관계들에 의거해서만 진실로 존재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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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시 속도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속도 역시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서 도출된 상대적인 양임을 상기하며, 전시는 전개될 이야기 안에서 진정한 지속을 모색한다. 부서진 시간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몸과 발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의 시간은 여기 놓여 있는 것들의 특별한 배치 내에서만 구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5) 《Don’t Be Hasty》는 서둘러 판단하거나 결론 짓기를 멈추고, 지속되는 흐름에 합류하여 머무르기를 요청한다. 관건은 지속을 대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 속에서, 우리를 담고 있는 이 합류점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다.6)
김상하, 서민우, 이용재는 각자가 담지한 시간의 부피를 저마다의 매체적 속성으로 빚어냈다. 전시는 이들이 다루는 매체의 고유성이 실재의 등가물로서 시간이라는 개념에 천착하는 대신, 그 너머로 추동하는 비스듬함(obliquité)을 지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7) 영상, 소리-조각, 그림은 파편화된 감각을 띠고 있을지라도 가까이 외재하며 서로의 감각 장(field) 안에 서서히 개입해 간다. 각각은 동일한 물리적 조건에서 움직이지만, 다른 속도, 다른 감각의 통로를 통해 관객에게 도달한다. 이때의 주된 감각들은 한 발짝씩 느리게 다가올 테다. 이를테면 전시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바깥으로 새어 나와 당신을 맞이하는 것은 ‘소리’였을 것이다. 감상보다 앞선 청취의 경험은 김상하의 영상에서 일부 비롯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소리는 이내 영상에 수반된 것으로 포섭되어 투사된 이미지의 형태로 지각된다. 동시에, 또는 조금 늦게 마주한 서민우의 구조물은 시야에 너르게 포진되어 있다. 공간 속에 조용히 놓여있는 듯 보였던 그의 작업은 사실 소리-조각으로서, 전시장을 둘러싼 청취 환경을 계속해서 바꾸어 놓는다. 한편 가장 느리게, 가장 사물다운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용재의 그림이다. 표면의 반짝임과 지지체의 물성, 프레임 안팎의 여러 단서들을 따라가다 보면, 체현한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구현된 필치를 발견하게 된다. 어느새 귀에 꽂혀 생경하게 들려오던 소리는 주변의 소음으로 자취를 감춘다. 다시 주위를 살피면, 이제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당신의 안에 있던 것일 테다. 반복하여 보고자 할 때, 듣고자 할 때, 이곳은 처음 들어섰던 낯선 풍경과 전혀 다른 얼굴로 당신을 맞이한다. 각자의 몸이 엮어낸 시간, 그 느린 지각의 궤도 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지속의 가능성이 여기 놓여있다.

언제나 과정 중에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소문일 것이다. 1926년과 2025년을 오가는 김상하의 〈그 그림자를 죽이거나, 혹은 따르거나〉(2025)는 영화 〈아리랑〉(1926)에 대한 소문을 덧쓴다. 〈아리랑〉은 당시 큰 성공을 거둔 민족 영화로 회자되지만, 원본 필름이 소실되어 현재는 아무도 볼 수 없다. 소문과 소문에 관한 기록은 벌어진 시간의 간극을 메우기보다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더한다. 목소리가 거세된 무성영화 속 배우, 영화 속 살인 액션을 반복적으로 따라 하는 퍼포머, 두 얼굴 위로 드리우는 말(소리)과 글(자막)은 여기 저기 산포되어 있던 소문을 한곳에 투사된 여러 겹의 레이어로 직조한다.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의 형식을 통해 김상하가 덧쓰며 남기는 것은 영화의 실체보다는 또 다른 소문-이야기가 될 기제에 가까워진다. 현실의 영화로부터 탄생했으나 “도리어 자신이 태동한 현실을 장악하고 바꾸는 소문”의 기제.8) 이 중심에는 일파만파 소문을 전했던 관객의 역능이 있다. 작가는 〈아리랑〉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공모하기 위한 배우 중 한 명으로 관객을 전치시킨다. 이는 영상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존재감 있는 등장인물인 거울 이미지로 드러난다. 관객과 배우 사이의 관계는 영화가 상영되던 극장 안 변사와 순사의 대립, 그리고 피식민지 민족이 내재화한 정체성의 분열과 맞물리며 복층적 구조로 확장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가 서로를 의식하는 크고 작은 맥락에서, 영상을 관통하는 살인 액션과 따라 하기의 전략이 패배자적 몸짓으로 읽히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거울 표면에 열린 저편의 자리에서, 나는 나를 보고 있는 나 아닌 나를 본다.

물결은 따라잡으려 할수록 더 먼 수평선으로 나를 밀어내고, 가만히 표류하다 보면 어느새 몸을 감싸안기 마련이다. 시간을 지우려던 서민우의 시도는 시간과의 더 깊은 얽힘으로 귀결된다. 〈해안선을 위한 사행 운동〉(2025)은 작가가 직면한 역설의 산물이다. 채집된 시간으로부터 잘려 나와 재배치된 소리들은, 파편화된 흐름 속에서 고유한 지속의 리듬을 획득한다. 작가는 다층화된 시간의 소리를 통해 일종의 주의 분산(distraction)을 일으킨다. 이때, 외재적으로 분산된 주의는 곧 다른 쪽으로 열린 집중을 향해 흘러든다.9) 수평성을 지향하며 해체했던 소리들의 위계 구조는, 복수의 지속들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의 매듭이 된다. 이를 유도하는 장치의 한편에는 시각적 대상 없이 청취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리의 잠재적 차원이, 다른 한편에는 조형적 배치와 외연을 통해 공간을 구획하는 조각의 현실적 차원이 자리한다. 서민우는 서로 반대급부의 성질을 지닌 두 경험이 소리-조각을 통해 유기적으로 맺는 구조를 역동적인 기호의 개념으로 수렴시킨다. 우리가 이 기호의 운동에 덧씌우는 ‘가정’은 일순간의 몰입을 통해 ‘포획된 순간’이라는 시간의 “모조품”에 도달하도록 돕는다.10) 동시에 기호들의 쇄도를 겪으며 관객이 체험하는 시간은, 하나의 기호 이전과 이후에 존속함으로써 지속에 이른다. 이처럼 관객은 의미의 고착과 유동 사이를, 몰입의 순간과 분산의 지속 사이를 오간다. 한편, 5대의 스피커를 뱀의 허물과 닮은 모습으로 감싸고 있는 라텍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식해갈 것이다. 특정한 시간성을 지닌 라텍스의 물질적 저항은 일말의 지향에서도 벗어난 희미한 이미지로 남는다.

불가지론에 이른 시간의 본질 앞에서, 시간이 되기를 자처한 그림은 어떤 결핍을 드러낼까? 이용재는 시간에 관한 사유의 마지막이 예외 없이 미끄러짐을 인지하면서도, 그림을 통해 사유가 놓치고 마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시간과 함께, 같은 한 겹에 있는” 쪽을 택함으로써 시간에 기꺼이 붙잡힌다.11) 이러한 접근은 시간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독특한 방법론으로 구현된다. 〈itself〉(2025)는 다빈치의 〈세례자 요한(Saint Jean Baptiste)〉(1517/1520)이 복원되지 않았던 과거의 어느 시점에, 뉴턴의 선형적 시간과 함께 찾아간다. 그러나 다시 현재에 도래한 듯 보이던 그림은 ‘문질러 닦아내는 양’이 ‘그리는 양’을 넘어서는 지점에 이르며 시간을 역행하는 과정을 겪는다. 작가는 〈itself〉 속 손가락을 그리지 않기 위해 앞서 〈dummies_1〉(2023)을 그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하여 결정론적으로 사고하는 습관 또한 그림이라는 매체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다시 살피면, 이는 ‘그림에 대한 그림’, 즉 메타적 그림의 내면에서 자유분방하게 펼쳐지는 과거가 현재에 배어든 결과로 보인다. 조금씩 다른 톤의 초록색으로 빛나는 〈chroma-key〉(2025), 〈background independent〉가 ‘배경’으로서의 시간을 정의하는 방식의 작업이라면, 〈a clown〉은 전경에 있어야 할 인물의 텅 빈 껍데기를 가리킨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무언가를 지시할 때에만 가치를 얻는 이 그림들은 상호 구성적인 관계 내에서 자리를 바꿔가며 역학을 이룬다. 이용재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여러 시간을 유영하는 자유로운 태도를 보이다가도, 완성한 후에는 예측한 미래에서 “현재 쪽으로 몸을 돌려 그것을 과거처럼 보는” 결정론적 사고를 구사한다.12) 결핍을 통한 기호로서 스스로의 시금석이 되는 그림은, 두 태도 간의 첨점(添點)을 도약 삼아 나아간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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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산포하는 소문, 서로를 겨냥하는 소리와 조각, 시간과 한 겹에 있는 그림. 그 앞에서 툭툭 끊어지는 발걸음, 머뭇거리며 의심하게 될 눈과 귀는 자신들이 새겨갈 기억으로 이곳의 시간을 데려간다. 결국 시간은 전시의 전반에 내세워져 있기보다, 그로 인해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선택과 마음, 이를 바탕으로 짜인 이야기들을 통해 어렴풋이 비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 안에서 무엇을 추억하고 갈망하느냐에 있다. 전시는 그 얼개를 실험할 수 있는 특권적인 장이다. 물론 이는 지나갈 소문이자 소음, 빛 바랠 이미지에 불과하며, 몇 차례 이우는 해와 달을 거치고 나면 자리를 비워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는 한, 앞선 것은 뒤따르는 것에 침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기억을 약속한다. 그 기억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영원이 아닌 영속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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