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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림 개인전: 피터
2025-08-01 ~ 202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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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는 어쩌면 아무 데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

🔉  TIP

운영시간
📍 장소 : 아트스페이스 보안 3
⏰  화-일:  12:00~18:00
❗ 휴무: 월

콘텐츠
✅ 피터
유예림 개인전

글 김진주

하나, 피터

피터는 어쩌면 아무 데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를 위해 만들어진 이름, 그를 중심으로 열린 전시, 그를 둘러싼 장면들 속에서 피터는 고정된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땅속에서 막 꺼낸 유골, 그 유골을 관찰하고 다듬는 고고학자의 모습, 박제된 원시인을 보는 박물관 관람객들, 그 옆에 전시물로 놓인 개미핥기, 발굴한 뼈와 뼈 조사에 활용할 도구들이 즐비한 연구실.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피터.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냐 묻는다면, 그는 도리어 그 질문들 사이에서 자꾸만 흘러 나가고 말 것이다. 오래전, 이미지의 비선형적 연관을 구성해 내던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라면 아마 이 상황을 ‘이미지의 생존’이라 불렀을 것이다. 사라졌지만 다시 보이고, 낯설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고, 완전히 드러나지 않지만 익숙하게 반복되는 그 무엇. 피터는 그런 잔존의 구조 속에서 유령처럼 등장하고, 복수의 이미지들 사이에 서성인다.

“나는 네 번째로 발견된 유골이다. 남자고, 서른두 살이다. 아니, 죽었을 때 서른두 살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정정하겠다. 나는 사만 삼천육백삼십칠 살이다. 1960년에 미국인 고고학자 랄프 솔렉키 박사와 그 양반과 함께 일하던 애송이 연구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샤니다르 4’라고 부른다. 내가 묻혀 있던 이 동굴의 이름이 샤니다르이기 때문인데, 이 얘길 듣고 나는 현생 인류의 빈곤한 상상력에 정말이지 실망하고 말았다.”

앞으로 이어질 인용을 포함해, 이 인용은 유예림이 ‘피터’를 상상하며 쓴 글의 일부다. 그림과 글 중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피터라는 인물은 전시 《피터》를 향해 나아가는 유예림의 여정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유예림의 이야기 속에서 피터는 죽은 인물이다. 그중에는 이러한 일화가 서술된다. 1960년대, 미국의 고고학자 랄프 솔렉키(Ralph Solecki)는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Shanidar Cave)에서 ‘샤니다르 4’를 발굴했고, 그 주변에 흩어진 꽃가루를 근거로 네안데르탈인의 장례 풍습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후 이 꽃가루들이 설치류의 저장 습성으로 인해 우연히 놓였다는 반론이 제기되면서, 이 사건은 일명 ‘꽃가루 논쟁’으로 남았다. 이 모든 서사는 실제이다. 그리고 이 서사는 유예림이 상상한 피터의 이야기 속에 겹쳐 등장한다. 그의 글은 여기에 또 다른 상상과 인물, 감정, 서사를 덧입힌다. 일단, 상상의 인물 이름으로는 피터, 실제 발굴된 유골 이름으로는 샤니다르 4가 ‘죽은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죽었냐고? 내 죽음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당신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나는 그냥 늙어서 죽었다. (중략) 하늘을 보고 바로 누워 있자니 목이 답답하게 졸리는 느낌이 들어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딪혔고,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에블린1)은 열심히 내 손과 발을 주물렀다. 여전히 춥긴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죽는다는 건 잠에 드는 것과 비슷했다.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에블린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사만 삼천육백오 년이 지나서 나는 무릎이 거의 턱에 닿을 만큼 다리를 구부린 채, 아기처럼 웅크린 자세로 고고학자들에게 발견되었다.”

사실, 피터는 이곳 어딘가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림 속에 박제된 동물이나 선반에 비치된 뼈처럼, 정수리부터 목까지 정말 얼굴이라고 부를 부분만 남겨진 채 멈춰 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렇게 이곳은 점점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4만여 년 전의 시간에서 출발해 고고학자들의 발굴이 이루어진 20세기 중반을 지나, 피터를 비롯해 많은 것이 상상적 서사로 꾸며진 지금의 시간을 아울러 간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은 결국엔 ‘그림’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이곳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누적할 뿐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시간들까지 예비한다.

둘, 회화

회화는 단순히 어떤 장면을 고정하거나 남기기 위한 매체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아직 명명되지 않은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시간의 조각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중에 완전히 이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지나간 시간들을 쌓을 수밖에 없는 현실의 제약에 빠져든다. 유예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수집한 현실의 이미지 조각들—도끼, 유골, 전형적인 포즈 등—을 모아 재조합하며 회화 속 장면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단 하나의 사건이나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것은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에 정렬되지 못한 채로 남은 사물과 같이, 화가가 그리기의 과정에서 보낸 시간의 편린으로 머문다.
피터는 유예림이 그리는 수많은 이미지들, 예를 들어 묻힌 유골, 땅을 파는 사람, 카메라를 드는 관람객 등이 잠시 동안 스쳐 가는 좌표다. 그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며, 특정한 중심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피터는 유예림이 그려 내는 이미지들의 묶음이자, 반복되는 구성의 비가시적인 중력이다. 그러한 연쇄는 명징한 서사를 구성하려는 목적과 거리가 있다. 피터는 시간적 간극을 두고 재등장하는 이미지, 즉 바르부르크가 말한 ‘나흐레벤(Nachleben)’—이미지를 둘러싼 반복과 유령 같은 귀환의 구조를 따라 유영한다.

이곳의 어떤 그림에는 발굴된 개의 뼈가 해부학적 구조에 맞추어 바닥에 배열된 장면이 등장한다. 뼈 사이로 자란 잔디를 보아하니, 그 위로 흘렀을 세월이 짐작된다. 여기서 회화는 시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피터 같은 오래된 유물이 연구되는 고고학과 흡사해진다. 그러나 고고학은 발굴을 통해 과거를 끊어 내는 반면, 회화는 그 이후를 따라가며, 이미지가 되살아나는 반복적인 흐름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멀어진다. 그렇게 유예림은 시간을 고정하는 이들의 몸짓을 닮되, 각기 다른 시간에서 건져 올린 장면들을 회화의 평면 위에 교차시키려 한다. 그러고 보니, 유예림의 회화 속 고고학자와 원시인은 참으로 네안데르탈인 피터의 모습을 닮았다.


셋, 만짐

유예림의 회화에는 종종 디지털 기기(의 액정)가 등장한다. 회화의 중심에서 벗어난 구석쯤, 동행인을 촬영하는 관람객의 스마트폰, 연구자의 책상에 올려진 노트북, 유골을 찍는 인물의 손에 들린 카메라 렌즈까지. 현장에서의 기록을 일삼는 기계들은 그렇게 회화 속 세계에 은근히 침입해 있다. 그런데 그 화면들 역시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인 유골, 즉 피터를 피사체로 삼지 않는다. 마치 눈을 감은 상태로 무언가를 본 듯이, 여기서 화가가 언제나 회화라는 개념을 마주할 때 당면하는 ‘보기’와 ‘만지기’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
화면 속에 다시 등장한 또 다른 화면—디지털 기기(의 액정)는 마치 프레임과 이미지가 중첩된 액자처럼 회화의 표면을 겹겹이 읽히는 평면으로 만든다. 유예림은 그림을 회색 중심의 (프레스코 같은) 탁한 색감, 고르게 도포된 색면, 매끄러운 번짐 효과로 채우며 물리적인 요철을 지우고 표면 전체가 균질해지도록 유도했다. 어느 하나 유별난 질감이 없는 그의 그림에서, 그가 진입시키려는 ‘만짐’의 감각은 회화의 ‘촉각성’을 떠올릴 때 흔히 생각하는 마띠에르나 물질의 두께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화면의 일부가 아니라, ‘전반’을 고르게 읽도록 한다. 그 위에 시선이 오래 머물수록 우리는 그것이 촉각적인 표면임을 알게 된다. 손이 아닌 눈, 달리 말해 시선으로 만져지는 표면.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깊이란 가시적인 것들의 상호관계 안에서 체험되는 구조라고 말한 바 있다.2) 유예림의 회화는 그런 깊이를 평평하게 도포되는 표면을 통해 시간의 켜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구현한다.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는 인물은 단순히 ‘지금’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이 겹친 장면을 응시하는 듯 보인다. 유골이 놓인 자리, 박물관의 전시물, 고고학자의 손끝. 그림에 그려진 장면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자, 동시에 상상의 일부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화면의 중첩으로 포개질 때, 회화는 계속해서 교차하는 시간의 합에 가닿으려 시도한다. 그것은 나아가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상상의 세계를 포괄하는 시간 속 만질 수 없는 사물에 시선을 붙들어 두려는 화가의 태도를 증거하기에 이른다.


“내가 좀 더 젊었을 때, 고고학자들이 ‘샤니다르 1’, ‘샤니다르 2’ 같은 지루한 이름으로 나와 내 친구들을 지칭할 때면, 우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연구실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쟤 이름은 샤니다르 1이 아니라 존이라고!” 이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끓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 이상 움직이거나 말을 할 수 없는 내 처지를 맞닥뜨리고 좌절했다. 다리 근육과 인대가 모두 풍화되었고, 성대, 인두, 혀 같은 발성 기관 역시 유실된 지 오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만 한세월이 걸렸다. 이제는 뭐, 사 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모든 걸 바로잡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돌멩이나 나무처럼 가만히 있으면서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세상 사는 방법이다.”

피터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유예림의 목소리를, 다시 상상해 본다. 그렇게 겹친 발화의 층위가 회화의 내부로 침투한다. 그래서 유예림의 회화에서 ‘만짐’이란, 물리적인 접촉이라기보다는 시간과의 접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끄럽고 균질한 화면 위에 그는 자꾸만 시간을 얹고, 그 표면에는 이미지가 겹겹이 놓이며, 서로 다른 시점들이 교차한다. 장면 바깥으로 스며드는 감각, 지나간 사물에 대한 응시,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어떤 증거라는 예감. 유예림은 그 모든 것을, 회화의 표면이라 불리는, 그러나 언제나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어딘가에 유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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